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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 시험을 위한 준비

현대천사 2008. 7. 25. 16:31

1. 삼보사찰

불교에서 삼보는 불보(佛寶, 부처), 법보(法寶, 부처의 가르침), 승보(僧寶, 그 가르침에 따르는 수행자의 집단)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승주의 송광사(松廣寺)를 삼보사찰이라고 하죠.

양산 통도사가 불보사찰이 된 이유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엣날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이 불사리와 부처의 가사 한 벌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경주 황룡사와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에 안치하고 가사도 통도사에 안치했답니다. 그래서 통도사가 불보사찰이 되었고, 지금도 본당 대웅전에는 다른 절과는 달리 불상 대신 사리를 모시고 있답니다.

합천 해인사는 부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이죠. 그래서 법보사찰이라고 합니다.

승주 송광사는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이 당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정혜결사(定慧結社)의 근본도량입니다. 그 후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죠. 그래서 승보사찰이라고 불립니다.


2. 신라의 삼보

<삼국유사>에 보면 "고려왕이 신라를 치려고 하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으니 침범해서는 안 된다. 그 첫째는 황룡사 장륙존상이요, 둘째는 황룡사 9층탑이요, 셋째는 진평왕의 천사옥대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신라3보가 나온 것이죠.

황룡사의 장륙존상: <삼국유사>에 보면, 인도의 아소카 왕이 석가삼존불을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 3만 분과 황철 5만 7,000근, 석가삼존의 모형을 배에 실어 바다로 띄우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서 장륙존상이 조성되기를 축원했는데 경주에 이르러 574년에 불상이 완성되었다 합니다. 이때 장륙존상의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답니다. 이 황룡사장륙상은 이듬해 왕이 돌아갈 것을 미리 알고는 눈물을 발꿈치까지 흘려 땅을 1척이나 적셨다고 하는 설화가 전합니다. 이 불상은 1238년 몽골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두 다리와 신광(身光)을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는 3개의 자연석 대좌로 보아 삼존불입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장륙이라 했으니 길이가 1장(丈) 6척(尺), 보통 사람 키의 2배가 넘는 5m 정도의 거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인도의 아소카 왕이 불상의 견본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이국적인 불상양식을 반영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황룡사 9층목탑: 역시 <삼국유사>에 보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법사의 발원으로 643년에 백제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가 이간(伊干), 용춘(龍春)과 함께 200여 명을 거느리고 2년 동안 작업하여 645년에 완성했다는 목탑입니다. 탑의 높이는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 80m에 이르며, 이 탑의 기둥 속에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등을 봉안했다고 합니다(위에서 통도사 얘기하며 잠깐 언급했죠?). 이 9층탑은 부처의 힘으로 외국의 침략을 막아 나라를 지킨다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濊貊)에 대항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718년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래 868, 872, 1012, 1022, 1064년에 각각 중수했으나 1238년 고려 때, 몽골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아홉 층의 탑이 상징하는 외국세력 중에 몽골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진평왕의 천사옥대: 하늘이 내려준 옥으로 된 허리띠라는 뜻입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진평왕 즉위 원년(579)에 천사가 전정(殿庭)에 내려와 왕에게 이르기를 '상황(上皇)이 나에게 명하여 옥대를 전하라고 하니 왕은 친히 받으라'하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 후 왕은 하늘이나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이 옥대를 착용했습니다. 고려가 개국된 후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선물로 옥대를 바쳤다고 하는데, 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삼보 중에 황룡사 9층탑 대신 만파식적이라는 피리가 들어갑니다. 이 피리 역시 현재 전하지 않으며 황룡사 9층탑보다 전설적인 물건입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는데, 다음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오고 있다는 전갈이 들어왔습니다. 이상한 일이라고 해서 점을 치게 했더니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왕에게 성을 지키는 보배를 주려는 것이니 해변에 가서 받으라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왕이 기뻐하며 바닷가에 나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산의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줄기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지자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왕이 그 산에 들어갔더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와 바쳤습니다. 왕이 용에게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를 물으니, 용은 그것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며 대나무가 합해졌을 때 베어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나오자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졌답니다. 왕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사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비가 올 때는 개이며,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다고 하지요.